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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구려 2대 왕 유리

by 인포쌤1 2024.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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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규 <고구려본기>

유리왕

주몽(동명왕)이 40세의 나이로 죽자, 유리는 궁중에서 고독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부여에서 살다 고구려로 왔기 때문에 유리를 따르는 세력도 없었습니다. 백성들과 신하들은 부여에서 온 유리가 그들을 쫓아내지 않을지 걱정하며 유리를 잘 따르지 않았습니다. 유리는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따를지 고민하며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힘 있는 가문과 결혼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고구려가 건국되기 전의 비류국을 다스리던 송양의 딸과 결혼을 하면 큰 힘이 될 거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리는 고구려를 세우는데 공을 세운 힘 있는 신하들의 딸과도 결혼을 했습니다. 여러 가문과 정략결혼을 해서 힘을 모으려고 했습니다. 유리는 다물도(비류국) 송양의 딸과 결혼을 하고 주몽(동명왕)이 확장한 비류국(다물도)과 해인국 그리고 북옥저 영토를 넘어 더 많은 영토를 확장하고 싶어 했습니다.

선비족

위의 지도를 보면 당시 고구려 근처에는 흉노족, 선비족, 숙신 이라는 나라들이 있었습니다. 서북쪽의 요수 가까이 살고 있던 선비족은 고구려를 툭하면 쳐들어 와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고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기원전9년 무렵 이런 소식을 들은 유리왕은 '선비족을 몰아내 고구려 사람들이 나를 따르게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선비족은 고구려 땅에 들어와 백성들을 괴롭히다가 조금만 불리해지면 산속으로 들어가 숨어서 도무지 물리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유리왕은 주몽(동명왕)과 함께 고구려 영토를 넓히는데 큰 공을 세운 부분노를 불러 선비족을 몰아내는데 앞장서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유리왕은 선비족과의 전쟁 때 직접 말을 타고 나가 군사들을 이끌며 싸웠고 큰 승리로 왕의 권위를 세웠습니다. 선비족을 고구려의 속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여러 세력가 중심으로 백성들이 뭉쳤던 힘을 왕이 중심이 되는 왕권 강화를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가 유리왕이 왕이 된 지 10년이 되었을 때입니다. 훗날 선비족은 연나라가 되어 다시 고구려를 괴롭히는 나라가 됩니다.

부여 대소왕

부여에서는 주몽을 괴롭히던 금와왕의 큰아들 대소가 왕이 되었습니다. 대소는 유리왕에게 큰아들 도절를 인질로 보내라고 전했습니다. 도절의 나이 12살로 어린아이였습니다. 유리왕이 대소의 요구를 거절하자 대소는 5만 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했습니다. 다행히 겨울이라 눈이 많아서 부여 군은 눈 속에서 얼어 죽으며 제대로 공격하지도 못하고 부여로 돌아갔습니다. 유리왕의 위세는 아버지 주몽을 능가할 정도로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대소왕은 고구려에 대한 분노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계속 군사를 보내며 고구려를 공격했습니다. 유리왕은 계속 쳐들어오는 부여 군사들이 두렵기 시작했습니다. 부여는 고구려보다 강한 군사를 가지고 있었고 대소왕은 고구려를 점령하면 분명 왕을 죽이려 할 것이니 전쟁을 꼭 멈춰야 한다고 유리왕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신하들은 부여와 계속 싸워야 한다고 해서 유리왕은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걱정하던 유리왕은 큰 결심을 했습니다. 이 결심은 고구려에 피바람을 가지고 왔습니다. 큰아들 도절을 부여에 절대 보내면 안 된다고 강력하게 반대하던 신하는 탁리와 사비였습니다. 유리왕은 탁리와 사비만 없으면 왕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둘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유리왕 첫째 아들 도절

고구려는 들판에서 돼지를 바치며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유리왕은 일부러 돼지를 놓아주고 탁리와 사비에게 돼지를 잡아오라고 시켰습니다. 왕의 명령을 받은 탁리와 사비는 돼지를 잡아 도망을 가지 못하게 다리의 힘줄을 끊어 놓았습니다. 유리왕은 상처가 난 돼지를 보고 화를 내며 상처가 있는 돼지로 제사를 지내면 하늘을 노하게 하는 것이라며 탁리와 사비를 구덩이에 던져 죽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를 망치려 하는 것은 나라를 망치고 백성들을 고통에 빠뜨리려고 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유리왕은 부여와 화친을 맺고 전쟁을 멈추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18살 큰아들 도절이 반대를 했습니다. 도절은 부여의 대소왕은 주몽(동명왕)을 욕되게 한 사람이기 때문에 절대로 화친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부여의 인질로 가느니 죽겠다고 말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유리왕은 신하인 탁리, 사비 그리고 큰아들까지 죽게 해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리왕은 도읍을 옮기기로 결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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