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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유리왕 둘째 아들 해명과 두번째 도읍 국내성

by 인포쌤1 2024.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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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왕은 3년 10월 졸본에서 국내성의 위나암으로 고구려의 도읍을 옮겼습니다.

해명

유리왕의 둘째 아들로 16세의 나이로 태자에 책봉되었습니다. 유리왕은 둘째 아들 해명에게 나라를 다스리게 하고 자신은 위나암에 궁궐을 짓고 편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1년 동안의 준비였습니다. 유리왕이 도읍지에 쌓은 성은 국내성이었습니다. 국내성 옆으로 흐르는 통구하가 압록강으로 흘러 산골인 졸본보다 교통이 편리하고 땅도 훨씬 넓었습니다. 유리왕은 국내성에는 왕을 거스르는 자가 없어 좋다고 말하며 사냥을 하며 나랏일을 소홀히 했습니다. 신하들은 도읍을 옮긴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랏일을 더욱 힘써 돌보고 백성을 살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냥이나 하고 다닐 때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쓴소리를 한 신하는 주몽(동명왕)과 고구려를 세운 협보였습니다. 협보는 주몽의 친구였습니다. 하지만 유리왕은 협보의 말도 듣지 않았습니다. 유리는 왕에게 훈계나 하려 한다며 협보의 벼슬을 빼앗고 농장에 가서 농장지기를 하라고 했습니다. 수치심을 느낀 협보는 고구려를 떠나버렸습니다. 유리왕은 자신에게 도전하려는 사람은 용서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유리왕의 첫째 아들 도절이 세상을 떠난 뒤, 태자가 된 해명은 졸본에 남아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해명은 힘이 세고 용감하며 백성의 마음을 잘 어루만져 주는 인물이었습니다. 유리왕을 곱지 않게 보던 졸본 백성이 해명을 잘 따르자 유리왕은 심술이 났습니다. 백성들이 해명을 잘 따르는 건 왕의 권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황룡국 왕이 해명에게 사신을 보냈습니다. 황룡국 왕은 힘이 세고 용감하다는 해명을 시험해 보려고 일부러 단단한 활을 보냈습니다. 단단한 활은 보통 사람이 당길 수 없는 활이었습니다. 해명은 황룡국 왕이 자신을 시험해 고구려의 체면을 떨어뜨리려고 한다고 생각해 활을 당겨서 아예 부러뜨려 버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유리왕은 힘으로 자신을 꺾어 보겠다는 속셈이라고 생각해 많이 불안해했습니다. 그래서 유리왕은 계루부, 절노부, 소노부, 순노부, 관노부 중의 관노부인 황룡국에 사신을 보내 이웃 나라 왕이 준 선물을 부순 해명이 무례하게 했다며 죽여도 좋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황룡국 왕은 사신을 보내 해명을 초대한다고 말했습니다. 황룡국 왕은 자기 나라로 해명을 초대해 죽이려 했습니다. 하지만 해명의 당당한 태도에 놀라 그를 죽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유리왕은 사신을 보내 해명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유리왕은 힘이 센 것을 믿고 이웃 나라와 원한을 맺어 자식 된 도리를 아니하였으니 죄를 뉘우치는 마음으로 목숨을 끊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명의 나이 21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아들을 둘이나 죽게 한 유리왕에게 부여 대소왕이 자신을 섬기지 않으면 고구려를 쳐들어 오겠다고 했습니다. 유리왕은 부여를 섬기겠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에 한나라가 쳐들어 왔습니다. 유리왕은 한나라를 물리치고 한나라의 고구려현을 차지했습니다. 한나라를 정복하고 부여에는 섬기겠다는 편지를 쓴 유리왕을 보면 당시 부여가 강한 나라였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를 정복하려는 주변 나라들은 늘 고구려를 넘보고 있었습니다. 유리왕은 국내성에서 10여 리 떨어진 위나암에 산성을 쌓는 공사를 했습니다. 이 산성으로 국내성을 보호하고 적이 쳐들어 오면 근거지로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이 산성을 환도산성이라고 불렀고 환도산성을 쌓은 기술은 오녀산성보다 더욱 발전해 오늘날 오골성, 대성산성과 함께 고구려의 3대 산성에 꼽힙니다.

고구려가 한나라와 싸우는 틈을 타 부여는 고구려를 쳐들어 왔습니다. 하지만 셋째 아들 무휼이 막아냈습니다.

황조가

아들 둘을 잃은 유리왕은 사랑하는 아내 둘과도 헤어졌습니다. 유리왕은 송양왕의 딸을 왕비로 맞았지만 그녀는 아들(도절)을 남겨 두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송양왕의 둘째딸을 왕비로 맞이해 첫째 해명, 둘째 무휼, 셋째 여진, 넷째 해색주, 다섯째 딸 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두 여인을 더 맞이하는데 한 여인은 고구려 토착 세력의 딸 화희였고 다른 여인은 중국에서 온 치희였습니다. 화희와 치희는 다른 세력이었기에 자주 다투었고, 중국에서 온 치희는 견디다 못해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유리왕이 간곡히 말리는 데도 치희가 떠나자 유리왕은 치희를 떠나보내는 쓸쓸한 마음을 가지고 나무 아래에서 치희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정답게 지저귀는 두 마리 새를 보고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그 노래가 황조가입니다. 이 노래는 우리나라 최초의 가사 작품으로 가장 오래된 사랑 노래입니다.

꾀꼬리 펄펄 날며,

암수 정답게 노니는구나.

내 외로움 거듭 새겨 보노라.

아, 누구와 함께 돌아갈까.

7. 고구려 유리왕과 대무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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