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고구려주몽의 아들 유리

by 인포쌤1 2024. 11. 11.
728x90

고구려 건국 10년 그리고 8월, 유화부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금와왕은 유화 부인을 태후의 예로써 장례를 지냈고 혼백을 모시는 사당을 세웠다고 전했습니다. 그해 10월, 주몽은 금와왕에게 예물과 함께 사신을 보내 깊은 감사의 뜻을 보냈습니다. 주몽은 임신하고 있던 아내 예씨부인을 떠올렸습니다.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이 전해온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궁금한 내색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씨 부인은 훌륭한 성품을 지닌 여인이었습니다. 예씨 부인은 부여에서 유리를 엄격하게 가르치고 길렀습니다. 유리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라 누구에게도 뒤치지 않는 늠름한 소년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는 마을에서 가장 활을 잘 쏘는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나 활의 명수를 '주몽'이라 부르는 동부여에서 아무도 유리를 주몽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유리는 아버지가 없어 늘 슬퍼했습니다. 왜 아버지가 없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물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리는 활을 들고 혼자 산과 들을 헤매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유리가 활을 들고 들길로 들어서는데 커다란 나무에 새 한마리가 앉아 있어 활시위를 당겨 새를 맞추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새는 놀라 날아가고 활은 나무 아래로 지나가던 아주머니의 물동이를 깨뜨려 머리 위로 물이 쏟아졌습니다. 아주머니는 유리를 쳐다보며 아버지 없는 자식이어서 버릇이 없다고 소리쳤습니다. 유리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가 왜 없는지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예씨 부인은 유리에게 아버지는 해모수의 아들이고 하백의 외손자, 그리고 고구려의 임금, 고주몽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유리는 기뻐해야 할 지 슬퍼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유리는 아버지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고주몽의 아들이라는 증표를 찾아야 한다고 말하며 증표가 있는 곳은 칠각형 돌 위에 있는 소나무 아래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아버지가 숨겨둔 증표를 찾아 아버지에게 가기로 결심한 유리는 매일 산과 골짜기를 헤매며 증표를 찾았습니다. 매일 증표를 찾아 헤매던 유리는 어느 날 마루를 내려가려고 했습니다. 순간 마루 밑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마루 밑 주춧돌에서 나는 소리 같았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주춧돌을 들여다 보니 칠각형 돌이었습니다. 유리는 갑자기 위를 올려다 보았습니다. 주춧돌 위에는 소나무로 만든 기둥이 있었습니다. 유리는 주춧돌 아래에 손을 넣어 보았습니다. 부러진 칼 조각이 잡혔습니다. 유리가 주몽의 증표를 찾았을 땐 세월이 많이 흐른 뒤였습니다. 할머니 유화는 세상을 떠났고 부여의 금와왕도 눈을 감기 직전이어서 큰아들인 대소가 왕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소가 왕이 되면 유리의 목숨은 위험해 질 건 뻔했습니다. 예씨 부인과 유리는 부여를 떠나 고구려로 향했습니다.

유리는 칼 조각을 주몽(동명왕)에게 건네고 주몽은 품속에서 부러진 칼 나머지 조각을 꺼내어 맞춰보았습니다. 유리는 이 때 나이 18세였습니다. 주몽은 자신의 아들임에 기뻐 유리를 안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신하들에게 유리를 태자로 삼는다고 발표했습니다. 고구려가 건국한 지 19년이 되고 유리를 태자로 삼은지 다섯달 쯤 되는 9월에 주몽은 시름시름 앓더니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주몽은 부여 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말합니다.  파리올림픽(2024년) 여자 단체전에서 대한민국 양궁은 10연패를 달성했습니다. 양궁에서 금 5개를 받으며 세계 최강국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 주몽 후예라는 말이 전해져 화제가 되었습니다. 고구려 건국 시조인 동명왕은 이름이 주몽으로 7세부터 활과 화살을 직접 만들어 활쏘기를 즐겼고 그때마다 백발백중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 벽화<수렵도>에서는 사냥꾼들이 말 위에 걸터 앉아 등자에 올려 놓은 다리로만 말을 다루면서 두 손으로 활을 쏘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활쏘기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야기 더보기:  “2. 주몽의 부여 탈출” ‹ 장쌤 정보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