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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국천왕에 이어 산상왕의 아내였던 우씨왕후

by 인포쌤1 2025.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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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천왕의 아내 우씨왕후는 형사취수제 결혼 풍속으로 산상왕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우씨왕후>

산상왕의 우씨왕후가 된 것입니다. 위의 그림은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우씨왕후>에서 고국천왕과 우씨왕후 그리고 우씨왕후와 연우(산상왕)의 모습입니다. 형사취수제 결혼 풍속으로 고국천왕의 동생인 연우가 왕위를 물려받게 하려고 하는 우씨왕후의 흥미진진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은 형을 대신해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연우와 형사취수제를 사용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우씨왕후의 이야기입니다.

 

 

형사취수제

고구려는 강력한 전사 계층과 농업 중심의 사회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고구려의 형사취수제는 주로 전쟁이나 갈등 상황에서의 폭력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형사취수제는 ‘형제의 복수를 취한다‘라는 의미입니다. 피해자의 가족에게 범죄자에 대한 복수의 권리를 인정하는 제도로 범죄가 발생하면 법적으로 재판을 통해 형벌이 내려지지만 고대 사회에서는 가족이 직접 처벌을 집행할 수 있었습니다.

고구려와 부여는 이러한 제도가 오랜 관습으로 자리 잡으면서 범죄 해결 방안으로 형사취수제가 쓰였습니다. 고구려는 강력한 전사 국가로 전쟁과 갈등이 많았던 나라로 폭력과 범죄에 대한 신속한 대응이 필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제한 없는 복수를 허용하지는 않았습니다. 형사취수제는 과도한 폭력을 막기 위해 고구려 사회에서 규율을 통해 어느 정도 제한되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죽으면 부인이 남편의 동생과 결혼해 그 지위를 이어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전쟁 때문에 남자들이 일찍 죽는 경우가 많아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삼는 제도가 널리 행해졌던 것입니다. 또한 인구를 증가시키고 홀로 된 형수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생겨났습니다. 가족이었던 여자가 다른 부족에게 시집간다면 씨족에게는 손해가 발생하기 때문에 재산과 노동력을 지키기 위해 생긴 결혼 풍속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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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천왕 동생 발기의 반란

고국천왕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대신 세 명의 동생이 있었습니다. 첫째 동생은 발기發岐(고국천왕의 형 발기拔奇와는 다른 사람), 둘째 동생은 연우, 셋째 동생은 계수였습니다. 우왕후의 계획에 따라 연우가 고구려 10대 산상왕이 되자 발기는 군사를 모았습니다. 그리고 왕궁을 에워싸고 소리쳤습니다.

연우 네 이놈! 형이 죽으면 바로 다음 아우가 왕위를 잇는 것이 당연하거늘 네놈이 예법을 어기고 왕위를 차지 하였으니 이는 죽어 마땅하다! 빨리 항복하고 나오지 않으면 네놈의 가족들을 모조리 죽이겠다!

발기의 협박에도 산상왕(연우)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독하게 먹고 가족들을 성 밖에서 죽여도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3일이 지나자 군사들은 점점 동요되기 시작하며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발기는 요동 태수 공손도에게 도움을 청하는 쪽을 택하며 후한으로 갔습니다. 군사 3만명을 주면 고구려를 멸망시키겠다고 말하며 발기는 고구려에 쳐들어왔고 동생 계수가 이를 막았습니다. 계수는 나라를 배반해 조상을 어떻게 뵈려 하냐며 형 발기를 꾸짖었고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한 발기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고구려 민심이 흉흉해 수도를 위나암에서 환도성으로

198년 산상왕은 또 다른 위기를 느꼈습니다. 백성들은 왕을 죽이고 형수를 왕비로 맞이했다고 말하며 형도 죽였는데 무슨 일인들 못 하겠냐며 고구려 민심은 흉흉했고 대륙에서는 후한이 무너지고 여러 세력들이 다투는 큰 혼란이 벌어졌습니다.

대륙 북쪽에서는 조조가 최대 세력이 되어 위나라를 세웠고 남쪽에서는 손권이 양쯔강 하류를 차지했으며 서쪽에서는 유비가 큰 세력으로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산상왕(연유)과 을파소는 수도를 대륙에 가깝게 옮기면서 영토를 넓혀야 한다고 생각하며 수도를 위나암에서 환도성으로 옮기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외척 세력들이 수도를 옮기는 일을 반대하고 203년에는 을파소까지 죽어서 수도 이전은 10년이 지난 209년에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환도성의 위치

환도성은 현재 학자마다 의견이 다릅니다. 어떤 학자들은 압록강에서 멀지 않은 국내성 가까이라고 하고 어떤 학자들은 국내성이 환도성이라고도 합니다. 중국의 <요서>를 보면 환도성이 위나암 성으로부터 서남쪽 200여리에 있다고 쓰여 있어 위의 그림처럼 산둥반도 아래쪽까지 영토를 넓히고 화북 평원의 곡창지대와 중국의 해안 지역을 얻으려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환도성이 어디 있었는지에 따라 고구려의 힘이 미치던 범위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수도의 위치가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한 다양한 학자들의 주장을 바탕으로 역사 기록을 넓은 시야에서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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