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버린 환도성 대신 평양성
위나라 군대를 겨우 몰아내고 불타 버린 환도성 대신 평양성에 머무른 동천왕은 평양에 머무른 지 1년 7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동천왕이 세상을 떠나자 맏아들 연불이 고구려 12대 중천왕이 되었습니다.
평양을 새 도읍지로
중천왕은 환도성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환도성은 이미 폐허가 되어서 중천왕은 평양성을 새 도읍지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매우 불안해하자 중천왕은 연나부의 여자를 왕비로 맞으며 왕실의 외척 세력의 힘을 빌려 전쟁 후의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했습니다. 왕비를 맞으면서 잔치를 열면 백성들도 불안에서 벗어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연나부를 제외한 귀족 가문들 사이에서는 연나부 가문이 권력을 쥐면 환도성이 불탄 것처럼 전쟁이 다시 일어나는 것이 아니냐며 불만을 이야기했습니다.
중천왕의 동생 예물과 사구의 반란
중천왕의 동생인 예물과 사구도 중천왕이 없다면 우리 둘 중 한명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 아니냐며 둘은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중천왕(연불)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했습니다. 중천왕은 국상 명림어수를 불러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모두 잡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국상 명림어수는 연나부 출신의 최고 신하였습니다.
관나부인
이듬해 관나부 출신이고 중천왕의 총애를 받은 여인이 있었습니다. 소후에 올리려고 했지만 거짓말을 했다고 해서 가죽 부대에 넣어져 바다에 수장된 관나부인이었습니다. 고구려본기 중천왕 자료를 살펴보겠습니다.

4년(서기 251년) 왕이 관나부인을 가죽 주머니에 넣고 서해에 던졌다. 관나부인은 외모가 매우 아름답고 고왔으며 머리카락의 길이가 9척( 1m 80cm )이었습니다. 왕이 그녀를 총애하여 장차 소후로 삼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왕후 연씨는 (1) 총애를 독차지할 것이 두려워 왕에게 아뢰길 “소첩이 듣기로는 서쪽의 위나라는 긴 머리카락을 구하는데 천금을 주고 구입한다고 합니다. 예전 우리 선왕께서 중국에 예를 다하지 않아 침범당해 달아나 사직을 거의 잃을 뻔했습니다. 지금 왕께서는 순리대로 그들이 하고자 하는 바에 따라 사신 한 명에게 (2) 행장을 꾸려 파견하여 긴 머리 미인을 바친다면 저들은 필시 흔쾌히 받아들여 다시는 침범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왕은 그 뜻을 알았지만 (3) 묵묵히 대답하지 않았다.

관나부인은 그 소식을 듣고 (자기에게) 해가 가해질까 두려워 도리어 왕후를 참소하며 왕에게 말하길 “왕후가 항상 소첩에게 꾸짖으며 말하길 (1) 농사꾼의 딸이 (2) 어찌 이곳에 있을 수가 있는가! 만약 스스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그 뜻은 왕후가 대왕께서 출타하기를 기다려 소첩에게 해를 가하고자 하려는 것인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이후에 왕은 기산의 언덕으로 사냥을 나가서 돌아왔을 때 관나부인이 가죽 주머니를 가지고 왕을 맞이하며 통곡하길 “왕후가 소첩을 이곳에 (3) 담아 바다에 던지려고 합니다. 은혜로운 대왕께서 소첩의 미천한 목숨을 살려주시어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신다면 어찌 감히 다시 측근에서 대왕을 모시기를 바라겠습니까? 왕이 심문하여 그것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고 분노하여 부인에게 말하길 “네가 바다에 들어가기를 원하는구나!” 사람을 시켜 그녀를 던지게 했다.
관나부인에 대한 중천왕의 애정이 깊어질수록 왕비 연씨의 불안감은 커졌고 연씨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관나부인을 쫓아내고 싶어 했습니다. 이러한 연씨 왕후의 마음을 중천왕(연불)은 알고 있었습니다. 관나부인도 왕후를 궁지로 몰려고 했지만 오히려 관나부인이 목숨을 잃게 된 것입니다. 기록에는 없지만 중천왕이 관나부인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따로 있는 듯합니다. 당시 조정은 연나부가 장악해 있었고 왕비 연씨는 연나부 출신이었습니다. 중천왕은 정치적인 선택을 한 것은 아닌지 추측해 봅니다.
왕의 권위를 되찾고자 한 중천왕
254년 연나부의 국상 명림어수가 죽자, 중천왕은 비류나부의 음우를 국상으로 임명하면서 왕의 권위를 되찾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연나부의 명림홀도를 중천왕의 부마(사위)로 삼으며 연나부에 등 돌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동천왕 때 관구검의 후퇴 이후 위나라 최고 권력자인 사마소(사마의 아들)는 고구려를 침략하려는 마음을 계속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259년 위나라 장수 울지해를 불러 고구려를 무찌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평양성이었습니다. 위나라가 공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중천왕은 지난 전쟁에서 위나라가 죽인 백성들과 불타버린 환도성을 생각하며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라며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직접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 군대를 물리치러 나갔습니다.
동천왕 시절에 위나라 관구검의 군대를 물리쳤던 비류수와 양맥 골짜기로 위나라 군사들을 유인하며 중천왕은 5천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고구려 지리에 어두운 위나라 군사들을 급습하며 승리했습니다. 위나라 군대는 8천의 군사를 잃었습니다.
이 전쟁의 승리로 인해 중천왕(연불)은 왕권을 되찾았고 군사력과 경제력을 키우며 국력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위나라와의 전쟁에서의 승리로 고구려는 한참동안 평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평양의 위치는 어디?
<삼국사기>에는 동천왕이 머무른 평양이 고조선의 도읍지, 왕검성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만약 왕검성이 지금의 평안도 평양이라면 고조선도 지금의 평양을 중심으로 한 나라인 셈입니다. 그러면 현도와 요동을 넘어 중국 대륙과 중국의 동해 해안까지 이르렀던 고조선과 고구려의 영토가 사라집니다.
그래서 박지원은 이를 침략당한 것도 아닌데 영토가 줄어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동천왕이 머무른 평양이 지금의 평안도 평양이라고 하면 고구려의 역사는 맞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가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을 때, 중국 대륙으로 나가기 위해서라고 했는데 평안도 가까이 옮기면서 대륙을 노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 평양은 어디였을까요? 조선시대 실학자 박지원은 1780년에 쓴 <도강록>이라는 책에서 평양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고구려의 평양은 평안도의 평양이 아니다. 중국 땅의 영평과 광녕도 평양이고 발해의 도읍지이자 요나라의 도읍지였던 요양현도 평양이다. 고구려는 왕이 머무는 곳마다 평양이라 했으니 지금 평안도에 있는 평양도 그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즉 평양이라는 말은 어는 한 도시를 말하는 것이 아닌 ‘도읍지’를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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