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차대왕을 죽인 연나부 명림답부가 추대한 왕인 고구려 8대 신대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고구려 태조왕의 동생인 백고
명림답부가 군사를 일으켜 차대왕을 죽일 당시 차대왕(수성)의 동생 백고는 산속으로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연재해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여름에 서리가 내리거나 지진이 일어나고 일식도 자주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하늘이 노했다고 수군거렸습니다. 혼란 속에서 명림답부는 폭군인 차대왕을 제거해 단숨에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권력을 가질 욕심을 가지지 않고 사람들을 모아 놓고 다음 왕은 누가 되는 것이 나은지 물었습니다. 백고가 산속으로 들어가 찾기 어렵지만 신하들은 고구려 태조왕의 동생인 백고가 다음 왕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명림답부는 왕실에는 정통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백고를 찾아 왕위에 오르게 했습니다.
명림답부 국상이 되다
신대왕(백고)은 명림답부와 같은 충신이 있어 나라와 왕실이 바로잡혔다며 국상(오늘날 국무총리)으로 임명해 나랏일을 살피라고 했습니다. 고구려는 원래 좌보, 우보라는 두 명의 최고 신하가 있었는데 국상은 좌보와 우보를 하나로 합친 것입니다. 고구려의 나랏일은 명림답부가 챙겨야 했고 군사를 책임지는 병마사 벼슬까지 가지고 있어서 사실상의 권력이 신상왕보다 명림답부 국상이 더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명림답부는 자신의 권력을 함부로 쓰지 않았습니다. 신대왕과 명림답부는 차대왕으로 인해 힘들었던 백성들과 차대왕에게 아첨하던 신하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이야기했습니다. 우선 옥에 갇힌 사람들은 모두 풀어주게 했고 차대왕의 신하들도 다시 나라를 위해 일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산속에 숨어 지내던 차대왕의 아들 추안이 신대왕에게 용서를 구하러 왔는데 신대왕은 조카인 추안에게 벼슬과 땅을 주며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했습니다. 이렇게 명림답부와 신대왕은 화합 정치를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화합정치
화합정치를 하면서 고구려는 안정을 되찾게 되었고 신하들 사이에는 새로운 질서도 있게 되었습니다. 국상 제도를 만들어 왕의 지나친 권력을 막게 했고 신하들의 대표가 나랏일을 책임지게 하며 정치적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국상 제도로 한나라의 침입을 막아 내는 데도 성공했습니다. 연나부의 명림답부 국상이었지만 고구려 5부인 계루부, 소노부(비류나부), 연나부(절노부), 환나부(순노부), 관나부(관노부)로 나뉘어져 분열되었던 백성들을 한마음으로 합치는데 노력했습니다.

부여의 무역 문제
고구려 태조왕(궁) 시절에 후한과 고구려는 화친을 맺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전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전쟁의 기운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의 기운은 부여의 무역 문제로 시작했습니다. 부여 왕은 현도군 사람들이 부여와 후한과의 무역을 방해하고 있다고 듣자 크게 화를 내며 왜 현도군이 방해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현도군은 부여가 후한과 직접 무역을 하는 것이 불만이었습니다.
현도군
현도군은 후한의 지배를 받는 지방군으로 지방에 태수를 두어 스스로 그 지역을 다스리게 한 곳입니다. 그래서 후한의 지배를 받았지만 독립적이기도 했습니다. 부여가 현도군을 통하지 않고 후한과 직접 무역을 하는 것이 늘 불만이었습니다. 부여 사람들이 지나가게 길만 빌려주고 아무런 이득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여 왕은 현도군을 공격하기로 결심하며 고구려와 선비에 부여가 현도군을 공격한다고 알리라고 말했습니다.
고구려와 선비는 부여가 현도를 공격한다고 듣자 부여가 현도군을 이기지 못할 걸 알았지만 부여를 응원했습니다. 명림답부는 부여와 현도의 전쟁이 고구려에 이익이라고 신대왕에게 말했습니다. 부여가 현도군과 싸우면 고구려는 후한을 공격할 수 있다고 말하며 예전 고구려 태조왕 시절에 부여가 후한을 도와 현도성을 거의 정복할 뻔하다 실패했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신대왕은 고구려 군사에게 선비와 연합해 후한을 공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전쟁은 후한의 남쪽에 반란이 일어나 멈추게 되었습니다. 후한 왕은 고구려와 선비족에게 전쟁을 멈추자고 제안했습니다.
후한의 침략
후한 왕은 전쟁을 멈추자고 제안은 했지만 나중에 꼭 복수를 하겠다며 다짐하고 후퇴했습니다. 172년 후한 왕은 남쪽의 반란을 막으며 수만 명의 군사들을 고구려에 보습니다. 신대왕은 신하들과 후한이 쳐들어오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었습니다.
신하들은 좁은 길목에서 후한 군사와 싸우면 이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신대왕은 명림답부에게 물었습니다. 명림답부는 좁은 길목으로 적을 끌어들여 공격하는 건 고구려가 자주 쓰는 전술이지만 이번에 쳐들어오는 후한 군사는 침략을 오랫동안 준비해 온 정예부대로 좁은 계곡에서 군사들을 만나면 위험한 싸움이 될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명림답부는 먼 길을 달려온 후한은 전쟁을 빨리 끝내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전쟁이 길어지면 식량이 떨어져 힘들게 되니 고구려 백성과 병사들은 산성으로 들어오라고 하고 들판은 곡식 한 톨 남아있지 않게 태워버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후한은 지쳐서 돌아갈 거라고 말했습니다. 돌아가는 군사들을 공격하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신대왕은 명림답부의 말처럼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고구려 군사들은 성 주변에 도랑을 파 놓고 보루에서 화살을 준비했습니다.
후한 군사들 돌아가려고 하자
후한 군사들은 도랑을 건너야 싸울 수 있었는데 화살이 날아와 건널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병이 들고 식량이 줄어들어 추위를 견디지 못하는 군사들이 늘어났습니다. 후한 장수는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왔는데 적군을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야 하는 이런 전투는 처음이라며 모두 돌아가자고 말했습니다. 이때 고구려 장수는 공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명림답부도 말을 타며 공격했습니다. 많은 후한 군사는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좌원에서 수만 명의 굶주린 후한 군사들은 수천 명의 고구려 군사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이 전쟁을 좌원대첩이라고 불렸습니다. 명림답부의 이번 전술은 고구려에서도 후에 계속 쓰이게 되었습니다.
명림답부 세상을 떠나다
77세의 나이로 고구려 8대 왕에 추대된 신대왕은 고구려를 안정시키는데 주력했습니다. 명림답부가 113세로 세상을 떠나자 신대왕은 그를 잃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3개월 뒤에 역시 생을 마감했습니다. 신대왕은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 아들 남무를 태자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불만을 품은 맏아들 발기는 196년에 연나부의 귀족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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