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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우씨왕후에게 괴롭힘 당한 동천왕

by 인포쌤1 2025.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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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씨왕후 사이에 자식이 없던 산상왕(연우)

우씨왕후 사이에 자식이 없던 산상왕은 우씨왕후의 눈치를 보면서 후비도 두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산상왕은 꿈 이야기를 신하들에게 말하며 아들을 갖고자 했습니다. 소후는 작을 소, 왕비 후 즉 후비를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우씨 왕후가 아닌 후비를 통해 아들을 볼 것이라는 꿈 이야기를 하며 왕후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꿈을 명분으로 후비를 들이려 했습니다. 하지만 산상왕은 우씨왕후와 연나부의 권력에 의해 후비를 들이지 못했습니다.

 

제사 준비하던 곳에서 돼지가 달아나

꿈꾼 날로부터 5년이 지난 후 제사를 준비하던 곳에서 돼지가 달아나는 일이 생겼습니다. 도망치던 돼지를 한 번에 잡은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의 이름은 후녀였습니다. 산상왕은 후녀가 궁금해 그녀의 집으로 우씨왕후 몰래 가서 만났습니다. 산상왕은 5년 전 꿈에서 봤던 하늘의 계시를 실현해 줄 길잡이가 돼지라고 생각하면서 돼지를 잡은 후녀가 궁금했던 것입니다.

4개월 후 우씨왕후는 후녀를 죽이기 위해 병사들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산상왕의 아이를 뱄다는 후녀의 이야기를 들은 병사들은 그녀를 죽이지 못했습니다. 이 아이가 바로 고구려 11대 동천왕입니다. 산상왕은 아이의 이름을 교체라고 지었고 213년에 5살의 나이로 그는 태자가 되었습니다. 산상왕은 왕위에 오른 지 30년인 227년 5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산상왕은 유언으로 우씨왕후와는 합장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씨왕후에게 괴롭힘을 당한 동천왕(교체)

동천왕은 덕망 있고 참을성 많은 성품으로 자랐습니다. 우씨왕후는 어린 교체를 괴롭히고 툭하면 매를 줬습니다. 하지만 교체는 한 번도 화를 내거나 우씨와 다투지 않았습니다. 동천왕은 외척세력인 연나부도 챙겨주기 위해 국상을 연나부 명림어수로 임명했습니다. 동천왕은 후한이 망하고 중국 대륙이 혼란에 휩싸여있어 영토를 확장하고 싶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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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나라, 오 나라, 촉 나라

동천왕이 왕위에 오를 때 위나라, 오나라, 촉나라 삼국의 왕들은 모두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면서 중국 통일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제갈량과 사마의의 맞대결을 소개했습니다. 조조, 유비, 관우, 장비 등 영웅들이 죽은 뒤 조조의 손자 조예가 위나라 왕위에 올랐고 유비의 아들 유선이 촉한 황제가 되었습니다. 오나라는 여전히 손권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갈량과 사마의가 유선과 조예를 보좌하고 있었습니다. 제갈량은 한나라 전통 계승을 표방하고 북벌을 주장했고 황제 유선이 즉위하자 북벌 전쟁 즉 위나라 침략을 시작했습니다.

동천왕 위나라와 손잡아

위나라와 오나라는 고구려와 손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고구려와 오나라는 고구려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동천왕은 위나라와 손을 잡기로 했습니다. 고구려는 234년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동맹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자 오나라의 손권은 매우 당황해했고 바로 사신을 고구려에 보냈습니다. 오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할 때 고구려 수군이 위나라와 같이 오나라를 공격하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고구려에 오나라가 사신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위나라 조예는 고구려에 간 오나라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동천왕은 신하들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논의했습니다. 오나라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면 위나라는 오나라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가지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동천왕은 오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위나라에 보냈습니다.

그래서 위나라와의 신의도 지켰고 오나라의 큰 원망도 줄일 수도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위나라와 오나라 사이에서 외교 관계를 잘 유지하며 지냈습니다. 그리고 동천왕이 지극 정성으로 돌보던 우태후(우씨왕후)가 235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태후(우씨왕후)는 산상왕 옆에 묻어 달라고 했습니다. 동천왕(교체)은 산상왕의 유언과 우태후의 유언을 생각하며 무덤과 무덤 사이에 소나무를 일곱 겹으로 심어 놓았습니다.

공손연 연나라 세우다

237년 위나라와 고구려 사이에 있던 공손연이 연나라를 세웠습니다. 238년 위나라는 연나라를 공격했고 위나라 총대장 사마의는 고구려에 원군을 요청했습니다. 동천왕은 군사 1천을 보내며 장수들에게 말했습니다.

잘 들어라. 지금 위나라가 차지하려는 연나라의 땅은 바로 고구려의 옛 땅이다. 우리가 군사를 보내 위나라를 돕는 것은 이 땅을 우리가 차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이를 잘 알고 행동해라. 또한 이 기회에 위나라 군대의 속사정을 자세히 살피고 돌아오도록 하여라. 결국 그들은 우리의 적이 될 것이다.

고구려 군대는 위나라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공격해 무너뜨렸습니다.

요동과 현도성 공격

위나라는 오나라와 촉나라와의 싸움으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천왕은 요동을 공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다음은 현도성을 공격하라고 했습니다. 고조선의 옛 영토였던 현도성은 고구려 6대 태조왕부터 고구려가 차지하고 싶었던 곳이었습니다. 동천왕은 현도성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요동과 현도까지 빼앗긴 유주 지사 관구검과 현도 태수 왕기는 부여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관구검은 위나라 총대장인 사마의를 찾아가 병사 1만을 받고 현도성을 공격했습니다. 동천왕은 위나라 군사가 수만이고 현도성의 병력은 수천 명에 불과하기 때문에 수에서 상대가 되지 않을 거로 생각하며 현도성에서 군사를 빼 위나라 군사들을 비류수로 유인해 유리한 지형을 활용하며 싸우기로 했습니다. 현도성 고구려 군사들은 위나라 군사들을 비류수까지 유인했고 숨어있던 2만의 고구려 군사들은 총공격을 했습니다.

한편 위나라 관구검은 주력 부대를 재정비하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승리를 이끈 고구려 군사들은 계속 싸움을 밀어붙이면서 힘이 조금씩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위나라 관구검

어느 날 관구검의 포위공격으로 고구려는 1만의 군사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동천왕은 1천여 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탈출했고 관구검은 환도성으로 달려가 모든 것을 불태우고 고구려 백성들을 죽였습니다. 고구려 최대 위기에서 동천왕은 장수 밀우를 불러 동천왕을 추격해 오는 위나라 군사들을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공격해 추격을 늦추게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밀우가 죽게 될 위기에 처하자, 동천왕은 유옥구에게 구출하라고 명령했고 다행히 살아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유유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던 동천왕에게 유유는 항복하겠다는 속임수를 써서라도 지금의 위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동천왕은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충성스러운 신하를 위험에 빠뜨리게 해 부끄럽다고 말했습니다.

유유는 군사 몇 명을 데리고 위나라 장수에게 항복하겠다고 전했습니다. 음식을 먹으며 기뻐하던 위나라 장수를 유유가 죽이자 동천왕은 추격하던 군사들을 무찌르고 관구검의 군사들에게 돌진했습니다. 관구검의 군사들은 이미 고구려에 피해를 많이 줬다고 생각하며 위나라로 후퇴했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동천왕은 환도성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환도성이 불타 평양성을 임시 도읍지로 삼으며 머무르기로 했습니다. 평양성으로 간 동천왕은 1년 7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동천왕이 죽자 많은 백성들은 슬퍼했고 왕의 무덤에 함께 묻히겠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성들이 왕의 은덕을 생각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신하들 중에는 자살하여 순장(죽은 사람과 함께 무덤에 묻히는 것)되기를 바라는 자도 많았으나, 새 왕은 예가 아니라며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례일에 왕릉에 와서 자살한 자도 아주 많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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