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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평민 을파소를 국상에 임명한 고국천왕

by 인포쌤1 2025.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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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왕의 둘째 아들 남무 고국천왕 되다

신대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남무는 어릴 때부터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맏형을 제치고 태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신대왕이 세상을 떠나자 남무는 고구려 9대 왕이 되었습니다. 고국천왕이 왕위에 오를 때, 나라의 모든 권력은 왕비의 집안사람들인 연나부에 있었습니다.

 

신하들은 첫째 발기 왕자가 천한 가문의 여자와 결혼해 태자가 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고국천왕을 연나부의 우소의 딸과 결혼하게 했습니다. 명림답부는 차대왕을 몰아낼 때 차대왕에게 불만을 가진 여러 귀족 가문 출신과 함께했습니다. 이 중에서도 절노부가 제일 앞장서서 차대왕을 몰아냈습니다.

절노부는 부족 시대의 이름이고 귀족 가문으로 발전하면서 연나부라고 불렸습니다. 명림답부도 연나부 출신이었습니다. 신대왕 전까지는 대부분의 왕비는 연나부를 제외한 다른 귀족 가문에서 나왔습니다. 하지만 차대왕 이후에 변화가 생기며 왕비가 연나부에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신대왕과 명림답부 시절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외척세력

하지만 명림답부가 세상을 떠나자 외척 세력의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외척세력이 중요한 벼슬을 모두 차지하면서 고국천왕은 능력 있는 인재를 쓸 수가 없었습니다. 외척 세력은 권력을 독점하고 백성들을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고국천왕은 늘 고민이었습니다. 외척 세력이란 왕의 외가 세력을 말하는데 당시에는 연나부 사람들을 가리켰습니다. 외척 중 대표적인 인물은 좌가려(연나부 우태)와 어비류(환나부 패자)였습니다. 좌가려와 어비류는 백성들의 집과 땅을 빼앗았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좌가려와 어비류 사람들이 지나가기만 해도 무서워 숨도 쉬지 못했습니다.

 


고국천왕 권력을 잡을 기회

고국천왕은 연나부와 친하게 지내는 척하면서 기회를 기다렸습니다. 어느 날 외척 세력 때문에 힘을 쓰지 못하던 고국천왕이 힘을 가지게 되는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그건 바로 전쟁이었습니다.

고국천왕 7년이 지난 무렵인 184년에 요동 태수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고구려에 전해졌습니다. 고국천왕은 후한은 농민 반란으로 매우 어지러운 상황이라고 생각하며 동생 계수에게 적을 물리치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후한은 생각보다 강했고 동생 계수는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고국천왕은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후한의 군대에 맞서며 좌원에서 고구려 군사들에게 외쳤습니다. “우리는 이길 것이다. 나를 믿고 따르라.” 고국천왕은 군사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으면서 앞장섰습니다. 고국천왕은 고구려 특유의 전술을 펼치며 깊은 계곡과 험한 바위에서 후한과 싸워 이겼습니다. 왕이 군사를 직접 이끌고 전쟁에 나가 승리하자 백성들은 누가 고구려를 넘보겠냐고 말하며 안심했고 고국천왕은 전쟁을 통해 백성들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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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으로 관리를 뽑으려는 고국천왕의 개혁 시작

전쟁이 끝나고 190년쯤에 고국천왕은 나쁜 짓을 일삼는 외척 세력을 물리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특히 좌가려와 어비류를 잡아 죄를 묻고 그 자리에 훌륭한 인재를 앉히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좌가려와 어비류는 군사를 모아 궁궐에 쳐들어왔습니다. 그들은 7개월 동안 나라를 어지럽히고 왕을 위협했습니다.

하지만 고국천왕은 반란군을 물리치고 귀족 가문에서 무조건 관리를 뽑지 않고 능력으로만 뽑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반란군을 물리치고 고국천왕은 개혁하기 시작했습니다.

5 부족 연맹체로 시작한 고구려는 관리들을 5부족 내에서 뽑았습니다. 고국천왕은 이런 관습을 깨고 능력 위주로 뽑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 영토를 동부, 서부, 남부, 북부로 나누었고 4부에서 국상을 뽑는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개혁은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고국천왕의 형 발기의 반란

하지만 이런 고국천왕의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고국천왕의 형 발기였습니다. 발기는 소나부의 우두머리를 만났습니다. 고국천왕을 왕위에서 내려오게 하고 자신을 왕이 되게 도와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소나부 사람들과 함께 요동 태수 공손도에게 가기로 했습니다. 10만명에 이르는 고구려 백성들이 요동에 가려고 하자 고국천왕은 군사를 보내 잡아 오라고 명령했습니다. 발기와 공손도는 요동 군사들과 소나부 사람들과 함께 고구려 군사와 싸우러 떠났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승리로 발기의 반란은 잠재울 수 있었습니다.


평민 출신 을파소를 국상에 임명

4부에서 국상으로 추천된 안류는 국상의 자리에 오를만한 인재가 아니라고 스스로 말하며 을파소라는 사람을 고국천왕에게 추천했습니다. 평범한 농사꾼인 을파소는 성격이 곧고 세상만사에 지혜롭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국상이 된 을파소는 고국천왕의 기대대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고국천왕은 지위가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국상에게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그 가족까지도 벌을 주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을파소가 국상이 된 것이 불만이었던 사람들도 그의 능력과 인품을 보고 을파소를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을파소는 고국천왕을 도와 돈으로 벼슬을 사고파는 일을 금지하고 실력 있는 사람을 관리로 뽑아 벼슬을 주어 나랏일을 맡겼습니다. 나라의 미래는 교육에 있다고 생각한 을파소는 마을마다 청소년들이 모일 수 있는 집을 지어주었습니다. 고구려의 역사와 법, 유교 경전, 활쏘기 등 무예도 가르쳤습니다. 을파소는 <참전계경>이라는 책을 써서 백성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려고 노력했습니다.

진대법

또한 진대법이라 불리는 환곡제도를 펼쳐서 나라에서 백성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굶주림을 피하게도 했습니다. 이 제도는 조선 시대 환곡제로 이어지는 지혜가 발휘된 제도였습니다. 국가가 백성의 생존을 책임져야 한다는 중대한 원칙이 세워진 개혁이었습니다. 백성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는 중요한 국가 철학이 세워진 개혁이었습니다. 을파소는 공이 있는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죄를 지으면 벌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의 생활은 편해졌고 고구려 사회는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을파소의 개혁으로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체제로 변해갈 수 있었습니다. 위의 그림은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우씨왕후>에서의 을파소 모습입니다. 김무열은 고구려 최고 관직이자 제가회의의 수장인 국상 을파소 역을 맡았습니다. 농사 짓다가 국상이 된 을파소는 왕이 오랜 전쟁으로 자리를 비울 때에도 안정적으로 국정을 이끌었던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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