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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사군이 뭐에요?

by 인포쌤1 2025.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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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 즉 한4군이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한사군은 전한 무제가 고조선의 번한 영토를 멸망시킨 뒤 그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군을 말합니다. 낙랑군, 임둔군, 현도군, 진번군 이렇게 한나라가 세운 군급 행정 구역인 4군을 한사군(한 4군)이라고 합니다. 혹은 한군현이라고도 불립니다.

 

전한 무제

전한 무제는 누구일까요? 전한은 한나라가 전한, 신, 후한으로 나뉘어 있던 시대 중에서 신나라가 만들어지기 전 시기를 말합니다. 한무제는 중국의 5대 황제이고 중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황제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영토를 크게 확장했고 경제 발전을 촉진했습니다.

한사군의 위치

한사군의 위치는 현재까지 역사적 사료와 유물 등을 근거로 하여 추정되고 있고 정확한 위치는 학계의 의견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위의 그림에서 보듯, 왼쪽 그림은 한사군이 평양, 강원도 북부와 함경남도 동부, 황해도에 있다고 보는 학계의 이야기고 오른쪽 그림은 한사군이 허베이성, 베이징시, 산시성 근처라는 주장을 볼 수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를 겪은 조선의 역사가 잘못되었는지 잘 살펴봐야 할 때라고 생각됩니다.

 

진번군

진번군은 원래 진번국이라 불렸던 지역이었는데 고조선의 옛 영토였던 진번에 설치되었습니다. 하지만 설치 후 토착민들의 저항에 의해 임둔군과 함께 폐지되었고 낙랑군에 합쳐졌습니다. 진번군의 위치와 영역은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북쪽설에는 진번군이 요동지역에 있었다고 보거나 남쪽설에는 강원도 혹은 황해도 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발굴조사에서 황해도 사리원시(당토성)에서 사군대방태수장무이전(使君帶方太守張撫夷塼)이라고 새겨진 벽돌이 발견진 이후에는 황해도 지역을 진번군의 영토로 보고 있습니다.

임둔군

임둔군은 설치 당시에는 15개의 현을 관할했는데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서 낙랑군에 합쳐지게 되면서 사라졌습니다. 임둔군의 위치와 영토는 기록이 부족해 유물을 토대로 함경남도와 강원도 북부지역에 위치했을거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현도군을 설치했습니다. 토착민들의 저항이 심해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옯겨갔고 후한 초기에는 고구려의 압박으로 랴오닝성 푸순시로 옮겨졌다가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멸망했습니다.

낙랑군의 위치 여러 주장

한나라는 주변 토착민들인 부여, 고구려 등의 저항으로 진번군은 낙랑군에, 임둔군은 현도군에 포함시켰고 현도군은 3번이상 쫓겨나면서 한반도에는 낙랑군만 남게 되었습니다. 북한은 옛부터 낙랑군은 요서 지방에 위치했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평양 부근에서 출토된 낙랑의 유물을 보면 평양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하지만 낙랑군의 위치는 아직까지 여러 의견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평양지역과 중국 랴오닝성 지역에 있었다는 주장이 팽팽합니다. 낙랑군은 군사적 목적보다 경제적 목적이 강했던 지역이었습니다. 고구려 미천왕때 낙랑군이 점령되면서 사라졌습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대무신왕 15년 고구려가 한반도에 있던 최씨의 낙랑국을 평정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대무신왕 20년에는 대륙에 있는 한의 낙랑군을 병합하고 27년에는 한무제가 고구려에게 빼앗긴 낙랑군을 다시 공격합니다. 라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낙랑국과 낙랑군

낙랑국과 낙랑군은 다른 존재임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낙랑군이 점령되면서 낙랑 유민들은 당시 세력을 확장하던 모용외(연) 부족으로 갔는데 모용씨들은 이들을 요서지방에 정착시키고 그곳을 낙랑군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혹시 이런 기록때문에 낙랑군이 요서지방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지는 더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왕망

오순제 교수에 따르면 왕망은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신나라를 건국하는데 사방에 있는 왕의 이름들을 후로 격하시켰다고 합니다. 동쪽에는 현도, 낙랑, 고구려, 부여 등에 사신을 보냈는데 자기 나라에 사신을 보낼 이유는 없기 때문에 부여, 고구려 뿐만 아니라 낙랑, 현도에도 독립적인 세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왕망은 태수를 대윤, 낙랑군을 낙선군으로 바꿔서 평양 부근에서 출토된 낙랑대윤장이라는 봉니는 잘못된 표기라고 말했습니다. 낙선대윤장이 맞다고 했습니다. 일제식민사학자들이 이러한 유물들을 제시하며 평양지역을 낙랑군으로 조작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낙랑공주라고 부르는 것은 왕의 딸을 의미하는데 낙랑군에서 공주라는 칭호는 사용할 수 없다고도 얘기했습니다.

대방군과 낙랑군 위치

<열하일기> 박지원은 심양을 출발하여 93리를 가서 거류하를 건넜는데 이 강의 서쪽 7리에 거류하보가 있었고 다시 16리를 걸어가면 신민둔에 다다랐다고 글을 썼습니다. <만주원류고> 산천조에 따르면 요하는 구려하 또는 거류하라고 불렸다고 쓰여 있습니다. 이 부근에 현도군의 구려현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성경통지>에 따르면 거류하성은 광녕성의 동북 230리에 있다고 되어있고 일본이 만든 지도에는 요서지역의 신민의 동쪽 요하변에 거류하성이라고 표기되어 있었습니다.

현재도 요하 서쪽 신민시에는 요하 강변에 거류하촌이라는 지명이 남아있고 고대산에는 고구려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는 고구려산성이 남아 있다고 했습니다. 고대산산성은 해발 75m의 고대산에 있는데 성벽은 산세에 따라 토석혼축의 공법으로 쌓여 있고 현재도 남아있는 고구려성벽이라고 했습니다. 산성에 오르면 주변의 낮고 넓은 평야가 한눈에 들어오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 위치에 있는 곳이며 고대산산성을 바로 이당시 고구려가 차지한 현도군의 고구려현으로 보고 있습니다. 대무신왕 15년 고구려가 후한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자 광무제가 왕호를 회복해 주었다고 합니다. 태조왕 94년 고구려가 서안평을 쳐서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잡았다고 쓰여 있는데 이 구절을 보면 대방군과 낙랑군은 요동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자료출처: 산성의 나라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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