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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계루부 고씨만 왕이 될 수 있게 한 고구려 태조왕

by 인포쌤1 2025.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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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 국들에게 상당한 권한을 줘야 했던 고구려 왕

고구려의 첫 번째 왕이었던 주몽은 나국들의 세력을 누르고 왕이 되었지만 나,노국들에게 상당한 권한을 줘야 했습니다. 나, 노국들은 일정한 영역을 차지하고 조세를 거두는 권한을 보장받으면서 중앙 정부에 협조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날 때에는 군대를 지원하거나 자금을 보냈습니다. 권력을 나,노국들에게 나눠주는 대신 왕위를 세습할 수도 있었습니다. 왕은 나,노국의 지도자와 혼인을 통해 혈연의 관계도 맺었습니다.

 

고구려 태조왕은 계루부 고씨만 왕이 될 수 있다고 하며 왕의 권한을 확대

왕이 된 태조왕(궁)은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해 작은 연맹체 나라들의 지도자들을 중앙귀족으로 흡수했습니다. 귀족들을 5부로 개편해 연맹왕국에서 벗어나 중앙집권체제를 이루었습니다. 계루부에서만 왕을 배출할 수 있게 했고 소노부에서는 왕비를 배출, 절노부는 왕실과 혼인할 수 있게 했습니다. 순노부와 관노부에게는 높은 벼슬에 오를 수 있게 했습니다. 고구려 태조왕은 왕의 권한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혈연 중심의 5부를 약화시키고 지역 중심의 5부로 개편했습니다.

후한 황건군

태조왕이 요동 지역을 공격하고 산둥반도를 차지할 때 후한은 권력 다툼과 농민봉기가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후한은 황건군이 크게 일어나 나라가 휘청거리고 있었습니다. 황건군은 2세기 말 중국에서 농민들이 노란 수건을 쓰고 반란을 일으켜 황건군이라 불렸습니다. 노란색은 오행에서 토(흙)를 의미합니다. 후한 광무제의 오행상생설에 따르면 후한은 화(불)를 뜻합니다. 황건군은 화(불) 다음으로 오는 토(흙)에 해당하는 새로운 세상을 바란다는 마음으로 노란 수건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후한의 혼란한 틈을 노린 태조왕은 현도를 되찾을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고구려 태조왕 현도를 공격하다

태조왕이 말하는 현도는 한나라가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차지한 지역이었습니다. 고구려는 대무신왕 때 요하를 넘어 10개의 성을 쌓았고 그 후 요동에 순차적으로 7, 8개의 거점성을 쌓아 요동으로 전진하려는 기지로 삼았습니다. 후한은 요동에 요동군을 두고 심양에 현도군을 두면서 동쪽을 관리하려고 했습니다. 118년 고구려는 현도를 공격해 화려성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래서 후한은 유주 자사 풍환, 현도 태수 요광, 요동 태수 채풍 등에게 군사들을 모아 고구려와 싸우게 했습니다. 유주, 현도, 요동의 군사들이 모두 모였다는 것은 후한에게 현도는 엄청나게 중요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연합해 고구려의 예맥으로 쳐들어와 예맥의 관리들과 백성들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아 갔습니다.

태조왕 첫째 동생 수성에게 후한을 공격하라고 하다

태조왕은 첫째 동생인 수성에게 아무리 강한 후한이더라도 우리는 막을 수 있다고 말하며 수성에게 군사 2천을 가지고 후한 연합군을 물리치라고 말했습니다. 수성은 군사 2천을 데리고 예맥으로 갔습니다. 고구려 군사들이 온다는 말에 풍환, 요광, 채풍은 긴장을 하며 정탐 병사를 보내 살피게 했습니다. 고구려 군사가 겨우 2천이라는 이야기를 듣자 속임수가 있을지 모르니 기다려 보자고 이야기하며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수성은 군사들에게 싸운척하다가 도망을 하라고 말하며 후한 군사들이 얕보도록 만들자고 전했습니다.

 

후한 군사들은 고구려 군사들은 겁쟁이라고 비꼬았습니다. 하지만 풍환, 요광, 채풍은 고구려의 속임수일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고구려 군사들을 쫓는 것을 멈추고 군사들을 성안으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그러자 수성은 사신을 보내며 항복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군사 2천으로는 어림도 없어서 항복하겠다고 한 것이라고 믿은 풍환과 요광 그리고 채풍은 성안에서 군사들이 술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게 하였고 이 틈을 타 수성은 태조왕에게 군사 3천을 요동성으로 보내라고 전했습니다. 대부분의 군사들이 예맥에 있어서 요동성은 쉽게 함락시킬 수 있었습니다. 후한의 군사 2000여 명이 죽고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요동 태수 채풍도 죽으면서 후한 황제 광무제는 자신의 목숨도 위험하다고 느꼈습니다.

고구려는 북방의 선비족과 마한, 예맥까지 총동원해 후한과 싸우다

고구려는 북방의 선비족과 마한, 예맥까지 총동원해 후한과 싸웠습니다. 예맥은 부여, 고구려, 옥저, 도예 등 한반도와 만주 주변에 살던 주민들을 말합니다. 고구려에 복속된 예맥족까지 총동원 한 것입니다. 121년 태조왕(궁)은 현도성을 공격하라고 했습니다. 현도성을 무너뜨리면 고조선의 옛 땅을 되찾고 한나라를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후한은 지금처럼 고구려와 싸우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부여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부여는 고구려와 화친을 맺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했습니다. 고구려가 현도성을 차지한다면 분명 부여에 쳐들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후한을 도와주기로 결정했습니다. 부여 왕은 왕자 위구태에게 군사 2만 명을 데리고 고구려 군의 뒤를 공격하라고 했습니다. 고구려는 현도성 정복을 눈앞에 두고 후퇴하기로 했습니다. 현도군은 한이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세운 한사군 중의 하나였습니다.

 

사진출처: Think Tree

고구려 태조왕 현도성 정복에 실패

현도성 정복에 실패했을 무렵 고구려 태조왕은 병이 나서 드러누워 있었습니다. 이때 후한은 태조왕이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하며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진충이라는 신하가 적의 슬픔을 틈타 공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이야기하며 사신을 보내 화친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후한은 신하의 말에 공감하며 고구려에 잡혀간 포로들을 돌려받으려고 했습니다. 포로 한 명당 비단 48필을 바치겠다고도 했습니다. 태조왕은 신하들을 불러 모아 자신의 몸이 쇠약해져서 옛 고조선의 땅을 모두 되찾지 못했지만 넓은 땅을 얻었고 후한을 제압했으니 후한과의 전쟁을 멈추고 화친을 맺어 나라 안을 살피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요서 지역과 대륙의 바닷가 그리고 화북평야를 차지했으니 더 이상 고구려 사람들이 험한 산과 추운 땅에 살면서 힘들게 살지 않아도 된다고 신하들과 이야기하며 포로를 후한으로 보내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부여는 선비족과 고구려에 둘러싸여 후한을 드나들지 못하게 되었고 후한은 권력 다툼으로 나라가 뒤숭숭했습니다. 한나라가 기회를 엿보며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하자 후한의 요동 서안평을 공격하며 최고 관리들을 죽이거나 포로로 삼아 후한이 다시 일어서지 못하게도 했습니다. 강한 고구려를 만들어 낸 고구려 태조왕은 93년 1개월 왕위에 머무르다 100세가 넘은 나이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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