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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유화와 해모수 그리고 주몽의 탄생과 신화

by 인포쌤1 2024.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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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모수와 유화

해모수
유화

옛날 강의 신 하백은 딸이 셋 있었습니다. 세 딸은 강에서 헤엄치며 노는 걸 좋아했습니다. 어느 날 하늘 위에서 해의 신 해모수가 다섯 용이 끄는 황금 수레를 타고 지나가다 첫째 딸 유화를 보고 반했습니다. 해모수는 으리으리한 궁전으로 유화를 초대했고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부모의 허락 없는 결혼을 했는데 결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해모수는 하늘 님의 명으로 하늘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유화는 해모수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해모수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화는 집으로 돌아왔고 하백은 딸이 자신의 허락도 없이 혼인한 것을 뒤늦게 알고 대노했습니다. 그리고 유화를 집에서 내쫓았습니다.

쫓겨난 유화는 발  가는 대로 헤매다가 우발수가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금와왕을 만났습니다. 금와왕은 사냥을 나왔다 우연히 유화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했고 그녀가 갈 곳이 없다는 말에 궁궐로 데리고 와 둘째 왕비로 삼았습니다. 금와왕은 부여의 왕이었습니다.

부여

부여는 고조선이 멸망하고 난 후 고조선의 지배를 받던 지역의 만주와 한반도에 생겨난 새로운 국가들 중의 하나입니다. 부여는 만주 길림시 일대와 송화(쏭화)강 유역의 평야지대를 중심으로 성장했습니다. 부여의 건국 시기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략 기원전 2~4세기경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부여는 고조선이 멸망할 때쯤 세워져 약 600년 동안 있었습니다. 부여는 왕 아래 가축의 이름을 딴 관리가 있었습니다. 높은 관리들은 말, 소, 돼지, 개 등 가축 이름을 붙인 관직인 마, 우, 저, 구를 갖고 있었습니다. 가축의 이름을 붙인 관직의 이름으로 보아 농업보다 가축을 기르는 목축업이 중요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4명의 는 각각 한 지역을 맡아 다스렸습니다. 그 지역을 '사출도'라고 했습니다. 부여의 왕은 사출도를 다스리는 부족장들이 뽑았습니다. 즉 부여는 왕이 다스리는 중심부 그리고 사출도로 이루어진 5부족 나라였습니다. 부여는 순장이라는 장례풍습이 있었습니다. 노예의 상전이 죽으면 무덤에 함께 묻히는 장례로 1백 명의 노예가 같이 묻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여의 법은 아주 엄격했습니다. 사람을 죽이면 사형시키고 그 가족들은 노예로 삼았습니다. 도둑질한 사람은 훔친 물건의 12배를 갚아야 하고 남녀 간에 옳지 못한 짓을 저지른 사람은 사형을 시켰다고 합니다. 12월에는 온 나라의 백성들이 한자리에 모여 즐기는 '영고'라는 축제가 열렸습니다. 영고에는 많은 음식과 술을 준비해 하늘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 해의 풍년을 감사하고 다음 해에도 농사가 잘 되길 비는 행사였습니다. 영고 기간 동안 부여의 왕은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기도 하고, 그 벌을 줄여 주기도 하는 등 갖가지 어진 일을 베풀었습니다.  

금와왕

하루는 유화가 별궁 마당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먹구름 사이로 햇빛이 뚫고 나와 유화를 어루만졌고 그날 이후로 유화의 배는 커지고 또 커져서....열 달이 지나자 유화는 큰 알을 낳았습니다. 사람이 알을 낳자 궁궐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수군거렸습니다. 금와 왕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좋지 않은 일이니 갖다 버리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군사들은 알을 마구간에 버렸는데 말들이 알을 피하기 시작했고 배고픈 돼지와 개도 알에는 입도 대지 않았습니다. 돼지들은 유화가 낳은 알을 품에 품고 안았습니다. 그러자 왕은 알을 길에 버리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도 지나가던 말이며 소, 개 등이 모두 알을 피해 옆으로 자나 갔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왕은 알을 멀리 벌판으로 가지고 가 버리게 했습니다. 그러자 새들이 날아와 날개와 깃털로 따뜻하게 알을 감쌌습니다.  결국 왕은 도끼로 알을 깨뜨려 버리라고 했습니다. 신하들은 도끼를 힘껏 내리쳤지만 알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지친 왕은 알을 유화부인에게 되돌려 주고 말았습니다. 시간이 흘렀고 어느 날 알에서 "응애"라는 소리가 들리더니 건강한 사내아이가 나왔습니다.

주몽

아이는 태어났을 때부터 남달랐습니다. 세상에 나온 지 한 달 만에 말을 했고 파리 한 마리가 앵앵거리자 아이는 어머니(유화)에게 활과 화살을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유화는 대나무를 깎아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아이는 활로 파리를 맞혀 죽였고 그날 이후 어머니(유화)는 아이를 주몽이라고 불렀습니다. 주몽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부여 말이었습니다. 주몽은 자라면서 점점 더 영특하고 슬기로웠고 그의 활쏘기는 따라올 자가 없었습니다. 이런 주몽에 대한 금와왕의 태자인 대소를 포함한 일곱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는 점점 더 커져갔습니다. 부여의 왕은 사출도라는 부족장들의 합의에 의해 뽑혔던 시기였고 그 제도만으로 보면 금와왕의 뒤를 이을 사람은 대소였지만 금와왕은 주몽을 주목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그래서 일곱 형제들은 불안해했습니다. 어느 날 주몽은 사냥을 나갔습니다. 금와왕의 왕자들도 사냥을 나왔고 주몽의 화살에 맞아 쓰러진 사슴을 들더니 자기들이 잡았다고 우겼습니다. 주몽은 자신의 화살을 보여주며 자신이 잡았다고 이야기했고 왕자들은 주몽을 나무에 묶고 궁궐로 돌아가버렸습니다. 주몽은 나무를 뿌리째 뽑아 궁으로 돌아왔고 왕자들은 무서워했습니다. 일곱 왕자는 금와왕에게 달려가 주몽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알에서 태어났고 대단한 활 솜씨와 힘이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냥 두었다가는 주몽이 왕의 자리를 넘볼 거라고 생각해서 일찍 없애버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해모수 아들, 주몽을 함부로 죽이면 큰 벌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을 들은 금와왕은 주몽을 불러 마구간에서 말을 돌보도록 했습니다.

주몽의 부여 탈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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