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나라가 중천왕이 이끈 고구려 군대에 진 뒤 고구려는 전쟁없는 평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 12대 중천왕이 270년 세상을 떠나자, 중천왕의 4명의 아들인 약로, 달가, 일우, 소발과 1녀 중에서 첫째 아들 약로가 13대 서천왕이 되었습니다. 북방정책을 펼친 서천왕과 14대 봉상왕의 망국 정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서천왕 연나부에서 왕후를 선택, 비류나부에서 국상
서천왕은 아버지 정책을 이어받아 연나부에서 왕후를 선택했고 비류나부에서 국상을 뽑았습니다. 왕위에 오르고 2년 뒤인 272~273년에 북방정책을 하기 위해 동북방 순시를 했고 이때 큰 흉년이 들어 고구려 전반에 경제적 위기가 생기자, 환곡을 나눠 주면서 적극적인 대처로 위기를 넘겼습니다.
숙신
고구려가 북방정책을 펼친다는 소식에 위협을 느낀 숙신은 고구려 변방을 선제공격해 고구려인들을 학살했습니다. 숙신은 물길, 말갈, 읍루 등 고구려 동북부의 여러 부족을 통칭하는 말로, 각각의 부락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숙신 정벌
서천왕은 동생 달가를 보내며 숙신을 정벌하게 했습니다. 그를 ‘안국군’으로 책봉해 북방의 부락을 직접 다스리게 하고 지방의 모든 군사를 책임지는 국방도 맡겼습니다. 달가 장군은 숙신을 물리치고 숙신이 지배하던 땅을 직접 다스렸습니다. 그리고 선비족이 부여를 침입해 부여 왕 의려가 스스로 목숨을 끊자, 부여는 무너지면서 왕족들이 달아났고 두 개의 분열된 북부여가 세워졌습니다. 원래의 부여 땅은 고구려가 차지하게 되었고 선비와 고구려는 대립하는 위치에 있게 되었습니다.
선비
선비는 늘 고구려에 복속하여 있었지만, 고구려가 발기의 난을 겪으면서 요동을 잃고 쇠약해지면서 한나라에 붙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250년경 선비는 우문 씨, 모용 씨, 단 씨, 탁발 씨의 4부족으로 나뉘어 다투었는데 모용씨 중에 창려 태극성에 본거지를 둔 ‘모용외’가 가장 강성했습니다. 이때는 중국의 위, 촉, 오 삼국이 다 멸망하고 진 사마씨가 중국을 통일했고 모용외에게 져서 요서 지역이 소란하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반란을 꿈꾸었던 서천왕 동생 일우와 소발
서천왕이 북방의 지도자로 우뚝 서고 있을 때 반란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동생인 일우와 소발이었습니다. 일우와 소발은 병이 나서 온천에 가 쉬겠다고 말하며 몰래 반란의 무리를 모으고 있었습니다. 서천왕(약로)은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우와 소발에게 왕의 명령을 담은 문서를 보냈습니다.
나라에 인재가 필요하고 젊은 왕족이 있으므로 너희에게 국상의 자리를 맡길까 한다. 일우와 소발은 즉시 궁궐로 들어와 국상의 자리를 받으라.
권력의 욕심이 가득했던 일우와 소발은 국상의 자리를 받기 위해 도성으로 들어왔지만 도착하자마자 서천왕이 보낸 군대에 잡혀 죽게 되었습니다. 일우와 소발의 반란 사건은 서천왕의 북방정책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북방정책을 하면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서천왕을 막기를 원했지만 서천왕은 북방정책에 힘을 쏟아 숙신을 이기고 부여 땅도 차지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서천왕은 288년 4월부터 11월 7개월 동안 북방을 돌아보며 북방 정책에 대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남방까지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292년 서천왕은 꿈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무렵 중국 대륙에는 진나라가 있었고 북방에는 선비와 고구려가 최강세력으로 있었습니다.
서천왕의 첫째 아들 상부가 고구려 봉상왕이 되어 달가를 죽이다
서천왕이 세상을 떠나고 292년 첫째 아들 상부가 고구려 14대 봉상왕이 되었습니다. 봉상왕이 왕위에 오를 무렵, 고구려에는 백성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영웅이 있었습니다. 바로 서천왕의 동생인 달가였습니다. 봉상왕은 자신보다 삼촌인 달가를 백성들이 더 좋아해서 왕의 권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며 달가가 반란을 일으킨다고 누명을 씌워 사형에 처했습니다. 백성들은 북방의 외적을 누가 막느냐고 말하며 슬퍼하고 불안해했습니다.
고노자가 이끄는 고구려군이 선비족 모용외를 막아
선비족은 달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고구려를 쳐들어왔습니다. 선비족의 모용외는 293년 평양성으로 향했고 봉상왕은 평양성을 버리고 신성으로 달아났습니다. 다행히 고노자가 이끄는 고구려군이 선비족을 막아 신성을 지켜냈습니다. 고노자 덕분에 봉상왕은 평양성으로 다시 돌아올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왕이 싸워 보지도 못하고 도망을 갔다고 말하며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며 불안해 했고 고구려는 혼란스러웠습니다. 백성들의 불안이 높아지자, 봉상왕은 누군가 자신을 내쫓으려 한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내쫓고 왕에 오를 인물은 동생 돌고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돌고에게 반역죄를 뒤집어씌워 돌고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게 했습니다. 이때 돌고의 아들 을불은 시골로 도망가 몸을 숨겼습니다. 이 일로 백성들의 불안은 더 커졌습니다. 왕이 나라를 지킬 생각은 하지 않고 애꿎은 사람만 죽인다며 고구려는 더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선비족 모용외가 다시 쳐들어왔습니다. 296년 모용외의 군대는 고구려 변방을 통과해 고국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때 모용외의 부하가 고구려 서천왕의 능을 발견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서천왕은 북방을 정벌한 고구려 왕이라고 말하며 능을 파헤쳐 고구려에게 두려움과 수치심을 느끼게 하자고 말했습니다.
모용외의 군사들이 서천왕의 능을 파헤치기 시작하려고 하자 풍악소리가 울리며 모용외의 군대에 다가왔습니다. 무덤을 파헤치던 모용외 군사들은 무덤에서 나는 소리인 줄 알고 겁을 먹고 달아나 버렸습니다.
봉상왕은 모용외의 군대가 서천왕의 능까지 파헤치려 하자 선조들을 어떻게 볼 수 있냐며 선비족을 막을 대책을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선비족의 침입을 두 번이나 겪고 나서야 봉상왕은 대책을 고민했습니다. 국상 창조리는 고노자를 신성의 태수로 삼아 북방을 맡게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고노자는 기병 5백으로 모용외 군대를 물리친 훌륭한 장수이니 적들이 그를 두려워해 함부로 쳐들어오지 못할거라고 말했습니다. 봉상왕은 고노자를 신성 태수로 임명하고 북방을 맡기었습니다. 선비족은 고노자가 북방을 맡고 있자 고구려를 쳐들어오지는 못했습니다.
봉상왕 백성을 살피지 않아
고노자의 활약으로 선비족이 침입하는 일은 없어졌지만, 고구려는 298년 추수를 앞두고 서리와 우박이 내려 농사를 망쳤습니다. 그래서 굶주리는 백성이 늘어났고 고구려 경제는 엉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봉상왕은 백성을 살필 생각은 하지 않고 궁궐을 더 크게 지어 왕실의 권위를 높이라고 명령했습니다. 봉상왕은 백성을 강제로 공사에 동원했고 더 많은 세금을 거두려고 했습니다. 배고픔에 지친 백성들은 농사도 모두 망쳐 세금을 낼 여력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하들은 궁궐 공사를 중단해야 한다고 봉상왕에게 건의했습니다. 하지만 봉상왕은 신하들의 말은 듣지 않고 오히려 누군가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걱정만 했습니다.
그리고 돌고의 아들 을불을 찾으라고 명령하며 백성보다 반란만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299년 고구려에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이듬해 정월에 다시 지진이 일어났고 2월부터 7월까지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서로 잡아먹는 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봉상왕의 사치는 멈추지 않았고 15세 이상의 남녀는 모두 궁궐 공사에 동원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백성들은 고향을 떠나 사방으로 떠돌거나 산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국상 창조리 목숨을 걸고
창조리는 봉상왕에게 목숨을 걸고 말한다며 왕의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지진과 가뭄이 일어나고 흉년이 심해 백성들은 살 곳을 잃고 있습니다. 그런데 왕께서는 이 같은 사정을 생각하지 않고 굶주린 백성들을 데려다가 궁궐을 짓게 하며 괴롭히고 있습니다. 왕은 부모라고 했는데 이런 행동은 전혀 부모답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변에는 강한 외적이 많습니다. 그들이 만약 지금 쳐들어온다면 왕실과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왕께서는 깊이 생각하소서.
봉상왕은 무서운 표정으로 웃음 지으며 말했습니다. 다른 신하 같으면 목을 쳤겠지만, 국상이라 용서한다고 말하며 다시는 이런 말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국상 창조리는 고통에 빠진 백성을 돌보지 않으니, 왕으로서 자격이 없다고 말하며 폭군 봉상왕을 몰아내야 한다고 신하들과 이야기했습니다.
창조리는 반란을 일으켜 봉상왕을 쫓아냈고 을불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창조리의 반란은 아주 쉽게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국상 창조리와 조정의 핵심 인물들이 모두 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폭군 봉상왕은 신하들에게 신뢰를 완전히 잃었던 것입니다. 별궁에 유폐된 봉상왕은 두 아들과 함께 자결하며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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