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오블완9 고구려 대무신왕의 동생, 유리왕의 아들 해색주, 대무신왕의 아들 해우 민중왕(해색주)후한이 낙랑을 빼앗을 무렵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 왕자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대무신왕은 충격을 받아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대무신왕은 슬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병에 걸려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호동을 모함했던 왕비의 아들 해우의 왕 자리를 넘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대무신왕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를 이을 아들은 해우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해우는 너무 어린 나이여서 대무신왕의 동생 해색주가 왕이 되었습니다. 해색주는 고구려 4대 왕인 민중왕이 되었습니다. 민중왕(해색주)은 왕위에 올랐지만 조카 해우를 대신해서 왕에 올라 늘 마음이 조마조마했습니다. 사람들은 해우가 크면 분명 왕의 자리를 물러나야 한다고 말할 것 같아 두려웠습니다. 민중왕(해색주)는 해우를 죽이고 싶어 했지만 고구려.. 2024. 11. 20.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 왕자와 자명고 고구려와 부여는 고구려 건국 이후 크고 작은 싸움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대무신왕에 의해 대소왕이 전사하자 부여에서는 왕위 다툼이 일어나 큰 혼란이 생겼고 대소왕의 막냇 동생 갈사수만이 남은 부하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달아나 압록강 유역에 갈사부여를 세웠습니다. 다른 부여의 왕족들은 고구려에 항복했습니다. 부여의 힘은 점점 약해졌고 고구려의 힘은 더 커졌습니다. 북쪽의 부여를 정복한 대무신왕의 눈길은 남쪽의 낙랑으로 향했습니다.후한을 세운 광무제, 유수중국에서는 왕망의 신나라가 무너지고 한나라가 다시 세워졌습니다. 신나라는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세워진 나라인데 신나라가 망하고 다시 한나라가 세워지게 되어 이름을 후한이라고 불렀습니다. 후한을 세운 황제는 광무제, 유수였습니다. 광무제는 영토를 넓히며 커가고 .. 2024. 11. 19. 무휼, 대무신왕 해명이 죽은 해인 서기 9년, 중국에서도 여러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무휼유리왕은 여섯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 도절과 둘째 아들 해명이 죽자 유리왕은 셋째 아들 무휼을 태자로 삼았습니다. 무휼은 어릴 때부터 영리하기로 소문이 나서 신동이라 불리었습니다. 무휼이 6살 때, 부여 왕 대소가 보낸 사신이 유리왕에게 부여를 섬기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나라에는 큰 나라와 작은 나라가 있고, 사람에게는 아이와 어른이 있듯이 아이가 어른을 섬기는 것처럼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고민을 한 유리왕은 대소 왕에게 명령에 따르겠다고 말하며 사신을 보냈습니다. 항복 선언이었습니다. 무휼이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직접 부여 사신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부여 사신에게 부여 대소 왕은 .. 2024. 11. 18. 고구려 5부 연맹체 고구려 5부 연맹체고구려는 압록강 유역에서 성장한 5개의 정치체인 '부'가 연합,연맹하는 형태로 건국되었습니다. 5개의 '부'는 계루부, 소노부(비류나부), 절노부(연나부), 순노부(환나부), 관노부(관나부) 입니다. '나','노'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흐르는 하천 변에 만들어진 집단으로 부족이나 소국을 말합니다.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기 전 압록강 중류 지역에는 소노집단이 중심이 되어 여러 지역 집단들을 합쳐놓은 연맹체가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강물에 흘러 내려오는 채소를 따라 올라가 송양왕을 만난 것처럼 이 당시 소노집단인 비류부가 중심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몽이 부여에서 남하해 계루집단을 만들고 송양을 이겨 주도권을 장악했다는 것은 소노집단에서 계루집단으로 연맹체 장이 .. 2024. 11. 12. 고구려주몽의 아들 유리 고구려 건국 10년 그리고 8월, 유화부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금와왕은 유화 부인을 태후의 예로써 장례를 지냈고 혼백을 모시는 사당을 세웠다고 전했습니다. 그해 10월, 주몽은 금와왕에게 예물과 함께 사신을 보내 깊은 감사의 뜻을 보냈습니다. 주몽은 임신하고 있던 아내 예씨부인을 떠올렸습니다.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이 전해온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궁금한 내색을 보이지 않았습니다.예씨 부인은 훌륭한 성품을 지닌 여인이었습니다. 예씨 부인은 부여에서 유리를 엄격하게 가르치고 길렀습니다. 유리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라 누구에게도 뒤치지 않는 늠름한 소년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는 마을에서 가장 활을 잘 쏘는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나 활의 명수를 '주몽'이라 부르는 동부여에서 아무도 유리를 주몽.. 2024. 11. 11. 고구려인에게 성은 어떤 의미일까요? 고구려 사람들은 산성과 평지성을 건축해 2중성 체제를 갖추었습니다. 평소에는 평지성을 중심으로 생활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산성으로 올라가 방어를 했습니다. 평지성이 일상생활을 하는 곳이었다면 산성은 전쟁을 대비한 피난과 방어의 공간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평지성은 교통이 편리한 넓고 평평한 곳에 쌓았고 산성은 길이 험하고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기 힘든 곳에 쌓았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평지보다는 산에 성을 쌓았습니다. 산 중턱이나 골짜기를 둘러쌓는 성은 쌓기는 어렵지만 일단 쌓고 나면 많지 않은 군사로도 쉽게 나라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벽돌을 굽지 않고 돌을 깎아서 쌓아올리는 육합쌓기를 했고 돌의 크기가 매우 컸습니다. 육합쌓기는 하나의 성돌이 반드시 6개의 성돌과 면하게 쌓는 방법입니다. 돌을 켜켜이.. 2024. 11. 10. 이전 1 2 다음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