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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영화 역사 살피기

폭싹 속았수다 무슨뜻?

by 인포쌤1 2025.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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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폭삭 솟앗수다’로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도 방언으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 방언 – 방언은 사투리라고도 하며 한 언어에서, 사용 지역 또는 사회 계층에 따라 분화된 말의 체계입니다. 어느 한 지방에서만 쓰는, 표준어가 아닌 말입니다.

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

 

1950년~1960년대 제주도 해녀

1950년대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는 오애순과 엄마(전광례)가 헤어져 살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애순이 엄마는 해녀였고 오애순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엄마 즉 친할머니 그리고 둘째 작은 아버지와 함께 학교를 다니며 살고 있었습니다.

1950년대 제주는 한국전쟁과 4·3 사건으로 매우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당시 제주 경제는 농업, 어업, 축산업 같은 1차 산업이 주를 이뤘습니다. 그중에서도 바다 깊은 곳에 들어가는 해녀들이 제주 가정 경제를 이끌었습니다.

  • 해녀 – 바닷속에 들어가 해삼, 전복, 미역 따위를 따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여자.

해녀들이 벌어오는 돈은 가정에서 큰 힘이 됐고, 남성보다 경제 주도권을 쥔 경우도 많았습니다.

 

1955년쯤 1인당 국민소득이 약 270달러(약 300원, 당시 환율 기준) 수준이었습니다. 제주 해녀는 물질로 하루에 쌀 한두 되(약 1.8~3.6kg)를 벌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물질 – 주로 해녀들이 바닷속에 들어가서 해산물을 따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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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이후인 1950년대 이후 의복은 어땠을까요?

조선시대까지의 한복은 넉넉한 품과 긴 치마가 특징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 전쟁 이후 의복의 실용성을 중요하게 생각해 저고리의 길이는 짧아지고 소매가 좁아지는 등 입기 편하고 활동하기 편한 디자인으로 변화가 되었습니다전통 한복에서 빠질 수 없었던 고름을 단추로 대체하고 서양식 의복과 접목한 새로운 한복은 활동성을 고려한 실용적인 디자인으로 변했습니다.

오애순 엄마 전광례 잠수병으로 29세에 세상을 떠나다

  • 숨병(잠수병) – 깊은 바닷속같이 압력이 높은 환경에 있다가 갑자기 보통 기압의 환경으로 되돌아올 때 일어나는 여러 가지 장애. 기압의 급격한 감소로 몸안에 녹아 있던 공기 중의 질소가 기포화하여 혈관, 뼈 등에 기포가 발생하여 일어난다. 관절통, 근육통, 피부 가려움, 호흡 곤란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오애순 엄마 전광례가 죽기전 애순이를 만나 손톱에 봉숭아 물들여주며

두고 봐라, 요 꽃물 빠질 즈음 되면 사람은 또 잊고 살아져. 살면 살아져. 손톱이 자라듯이 매일이 밀려드는데 안 잊을 재간이 있나

 

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

엄마도 때가 되면 잊혀지니 씩씩하게 살라고 말하며 손톱에 봉숭아 물들이기를 해줍니다.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오애순

8.15 광복과 6.25 전쟁을 겪으면서 교복은 상하 검은색 혹은 짙은 남색 중심의 교복을 입었습니다.

1969년 중학교 평준화 정책이 시행되면서 중학생의 경우 시,도별로 획일화 균일화된 검은색 교복을 입었는데 고등학교 교복은 학교마다 디자인과 색상이 조금씩 달랐다고 합니다. 교복은 1983년 교복 자율화 조치가 실시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아래는 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 드라마 속의 양관식과 오애순이 1960년대 교복을 입고 있는 모습입니다. 오애순은 윙칼라 블라우스에 어두운 플레어 스커트를 입었습니다.

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

 

1970년대 양관식과 오애순 그리고 세 아이

1970년 후반은 경제 성장과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던 시기였습니다. 정부가 수출 주도형 경제 성장을 추진하면서 도시화가 급격하게 진행됐고 농촌과 어촌의 인구가 감소하는 추세였습니다.

양관식과 오애순은 양금명, 양은명, 양동명을 제주도 바닷가에서 키우고 있었습니다. 1978년 여름 제주도를 강타한 태풍으로 동명이를 잃게 되는 안타까운 슬픔이 있었고 재해 속에서 자식을 잃은 부모가 남은 가족들의 생계를 챙겨야 하는 모습도 안타까웠습니다. 남은 두 아이를 위해 다시 일어서는 모습은 당시 부모로서의 책임감과 남은 자식의 생계를 이어가야 한다는 부모의 절박함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1980년대 서울 올림픽

폭싹 속았수다 드라마 속에서 올림픽 성화가 지나간다는 이유로 좌판을 철거하려는 공무원들이 등장합니다. 미관 정비라는 이유였습니다. 오애순은 자리에 드러누워 철거를 막으려고 합니다. 이후 오애순은 계장이 됩니다. 마을 주민 중에는 여자는 절대 안된다고 말하는 어른도 있었습니다.

서울대학교에 합격한 양금명은 서울에서 하숙집 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충섭의 소개로 극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됩니다. 충섭은 극장에서 포스터를 그리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80년대 초 한국 사회는 도시와 농촌의 격차, 빈부 격차, 문화 격차가 많이 벌어져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지방 출신 하숙생들이 서울대학교 주변에 살면서 체험적으로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1990년대 오애순이 금명이에게 “지금 세상이 무서워 일찍일찍 다녀야 돼.”

양금명도 과외를 하며 용돈을 벌고 좁은 언덕 꼭대기의 하숙집을 얻어 생활하지만 방 틈으로 들어왔던 연탄가스로 인해 양금명은 의식을 잃고 쓰러집니다. 그녀를 발견한 오애순은 어린 동명이를 잃었던 기억을 되새기며 오열합니다. 구급차도 들어오지 못하는 곳에서 하숙집에 있던 충섭이가 금명이를 업고 뜁니다.

양금명은 영범이와 결혼을 약속하고 결혼 준비를 하는데 이 당시 한국 사회의 결혼은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결혼은 집안과 집안의 결합이라고 생각했고 며느리의 조건은 순종이 중시되어 사회 생활을 했던 여성도 집안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IMF 외환위기

대우그룹이 화면에 잡히면서 금명이가 대우전자에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IMF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금명이는 퇴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금모으기 운동 모습도 드라마에서 볼 수 있습니다.

  • IMF 외환위기 사태는 나라에 달러(무역 결제의 통화)가 부족해서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은 사건입니다. (1997)
  • 국가채무 불이행은 국가의 신용도 하락, 차입 비용의 급격한 증가, 투자 및 소비의 감소, 통화 가치의 하락 등을 가져올 수 있고, 국내외 투자자들의 신뢰를 잃게 되어 수입과 수출에 어려움을 격게되고, 국제 금융시장에서의 대한민국의 위치를 약화시킵니다.
  • 금모으기운동 – 1997년 IMF 외환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금을 모아서 외채를 상환하려고 한 국민적인 운동입니다. 금모으기운동은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외환을 상환할 수 없게 되어 IMF 구제금융을 받게 되면서,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금을 모아 수출하여 이를 상환하자는 전국민적인 캠페인으로 1998년 1월부터 그해 4월까지 진행됐던 국민적인 캠페인입니다.

2000년 밀레니엄 시대를 지나며 오애순과 양관식은 또다른 시련을 겪습니다. 시대의 흐름속에서 기억나게 하는 추억들을 떠올리며 드라마에서 전해오는 울림을 느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 “폭싹 속았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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